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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칼날을 감춰라

Posted 2017-11-24 09:16,   

Updated 2017-11-2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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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10월 10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1동 농림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에 단발머리의 한 서양 여성이 도착했다. 세계 무역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크다는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칼라 힐스였다. ‘칼날’ ‘독종’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강경파로 유명한 인사였다. 휑뎅그렁한 1층 로비에서 힐스 대표를 맞이한 이는 농림부 국제협력과 사무관 1명뿐이었다. 쇠고기 시장 개방 압력을 가하는 미국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농림부 장관과 마주 앉은 힐스 대표는 “쿼터 제한을 철폐해 쇠고기 수입을 자유화하라”고 요구했다. 장관은 “쇠고기 수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사표라도 내겠다”며 결기를 다졌다. 그만큼 정부 의지는 강했다.

 힐스 대표는 물러서지 않았다. “성급한 개방 요구는 자제해 달라”고 간청한 노태우 대통령의 면전에 대고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재계 총수가 총출동한 대미 통상사절단이 미국 워싱턴에서 보잉 항공기를 구매하는 ‘계약 세리머니’를 벌였지만 “어차피 항공기는 미국 아니면 살 데도 없지 않은가”라는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 새로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이 “쌀 수입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다”고 공언했지만 돌아온 건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이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미국의 대(對)한국 통상 압박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 정치권, 상공업계가 각각 목소리의 톤은 달라도 “미국산 상품을 더 사야 한다”는 원칙만큼은 확고하게 전달하고 있다.

 한미 통상 협상에서 변하지 않는 또 한 가지가 있다. 한국 정부의 좌충우돌 대응이다. ‘불공정한 무역을 바로잡으라’는 미국의 초지일관 요구에 한국은 ‘원칙과 기조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조차 헷갈릴 정도로 늘 우왕좌왕한다. 한쪽으로는 대미 사절단을 보내 구애를 보내고 다른 한쪽으로는 ‘호화 수입품 세무조사’에 나서는 식이다. 30년 전 정부가 부추기고 시민단체가 앞장서서 벌인 수입품 추방 캠페인에 미국 정부는 “국수주의 우려를 금치 못한다”고 트집을 잡았다. 결국 한국은 협상 내내 끌려다니며 이렇다 할 카드조차 내밀지 못했고 유통, 금융, 자동차 등의 시장 개방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역사의 실수가 되풀이돼선 안 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개정하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요구에 “시장 조사부터 해 보자”고 어설프게 대응하다가 “이러면 진짜로 폐기한다”는 압박에 부랴부랴 개정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한미 정상이 가까스로 ‘균형적 무역 증진을 위해 한미 FTA 협의를 촉진하기로 한다’고 합의한 지 열흘 만에 여당 대표는 “트럼프 정부와 말이 안 통해 굉장히 실망했다”며 비난 발언을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너무 농업 얘기만 하면 약점 잡힐 수 있다. 농업이 레드라인”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패는 미리 보여주는 게 아니다’라는 협상의 제1원칙을 정부와 여당이 스스로 걷어차는 모양새다.

 지금은 말을 앞세울 때가 아니다. 미국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정부와 업계가 힘을 합쳐 우리의 이익을 어떻게 극대화할 수 있을지 고민할 시기다. 어설프게 국내 반대 여론을 달래겠다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거나 상대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 “협상가는 예측 불가능하게 행동해야 한다. 상대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판을 벌여야 한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입에 달고 사는 협상 원칙이다. 김 본부장의 이런 원칙이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험난할 한미 FTA 개정 협상은 아직 첫발도 내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