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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할복론

Posted November. 22, 2017 09:10,   

Updated November. 22, 201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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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의 대하소설 대망(大望)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할복(割腹)이다. 의복을 갖춰 입고 앉은 패장(敗將)이 작은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면 옆에 선 무사(가이샤쿠진·介錯人)가 큰 칼로 목을 쳐 주는 식이다. 할복은 자살의 가장 극한 방식이다. 1867년 메이지(明治) 유신 때 법으로 금지됐다.

 ▷그럼에도 1976년 ‘록히드 스캔들’ 수사 당시 후세 다케시(布施健) 일본 검찰총장은 할복을 입에 올렸다. “무죄 판결이 나오면 배를 가르겠다”며 정치권의 반발을 진압한 것. 수사를 하는 쪽이 할복이란 말로 결기를 드러낸 것. 도쿄지검 특수부는 퇴임 후에도 일본 정치를 쥐락펴락하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구속했고, 다나카 체포 전날까지도 법무부 장관에 보고를 하지 않는 ‘철통 보안’을 지켰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척화파 김상헌은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영화 속 허구다. 청으로 끌려가는 시련을 겪지만 82세까지 장수했다. 우리나라에선 대개 ‘결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할복을 입에 담는다. 황명수 민주당 고문(2000년)과 신광옥 법무부 차관(2001년)이 각각 로비스트 린다 김과 진승현 씨로부터의 금품 수수 의혹이 제기되자 “한 푼이라도 받았다면 할복하겠다”고 한 게 대표적이다. 황 고문은 ‘단서 없음’을 이유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신 차관은 무죄가 확정됐다.

 ▷친박(박근혜) 핵심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이 16일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1억 원 수수 의혹과 관련해 “사실이라면 동대구역에서 할복하겠다”며 반발했다. 5년 전 저축은행 사건에 휘말린 박지원 의원의 트위터 글 ‘목포역 할복’에서 역명(驛名)만 달라졌다. 박 의원은 1심 무죄, 2심 유죄, 3심 무죄였다. 1998년 3월 새벽, 북풍(北風)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문구용 칼로 복부를 수차례 그었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놀란 검찰은 “할복 아닌 자해(自害)”라는 발표까지 했다. 아무리 결백을 강조한다고 해도 ‘할복’을 입에 올리는 게 어쩐지 불편하다.

조 수 진 논설위원 jin0619@donga.com